그랜드 투어: 여행과 독서 기록

<독일 생활> 독일 고속열차 ICE에서 경험 그리고 정신 건강 본문

일상 생각/2023년

<독일 생활> 독일 고속열차 ICE에서 경험 그리고 정신 건강

Writer Hana 2023. 5. 15. 01:12
반응형

나는 독일의 고속열차 ICE Inter City Express로 출퇴근하는 외국인 노동자다. 나처럼 장거리 출퇴근하는 사람을 독일에서는 펜들러 Pendler, 나는 여자니까 Pendlerin라고 부른다. 

 

한 달에 420유로짜리 반카드 Bahn card 100을 사면 독일 전역 어디든 갈 수 있다. 하지만 장거리 출퇴근을 위해 반카드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어디 한가롭게 놀러나 다닐 시간은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ICE


지난 목요일 퇴근길의 시작은 평소와 같았다. 저녁 퇴근 시간에는 독일 남부 여기저기서 올라는 기차들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이기 때문에 5-10분 정도 연착은 예사다. 그렇게 몇 분 늦은 기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런데 신나게 잘 달리던 기차가 원래 정차하지 않는 역에 서는 것이 아닌가. 별안간 들려오는 안내 방송. Strecke sperrung을 사유로 한 시간을 정차한다고 한다! 어? 한 시간??!! 설마 농담이겠지? 이미 출발한 열차가 이렇게 긴 시간 멈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주변 승객들이 하나 둘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통화내용은 다 비슷하다. 기차가 멈춰서 늦는다는 것. 이미 여러 사람이 통화를 마치고 내 맞은편 남자분이 늦는다고 통화를 시작하자 사람들이 푸하하 폭소를 터뜨렸고 나도 덩달아 웃었다. 한 시간 연착이 농담이 아닌 거 같아서 나도 결국 밖으로 나가 플랫폼에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밖은 쌀쌀해서 객실로 바로 돌아왔다. ebook을 읽고, 무심코 업무용 쥐메일을 열었다가 일도 한 가지 하느라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기차는 총 두 시간을 멈춰 있었다. 15분이면 갈 거리를 2시간이 걸려서 도착하게 되었다. 

오늘을 결코 잊지 못할텐데 기차에 오래 잡혀있어서가 아니라 독일 사람들의 태도가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15분 후 출발한다는 기차가 또 15분에서 30분 지연되고 또 늦춰지고... 그렇게 멈춰서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아무도 화를 내지 않는다. 화가 나고 불쾌한데 참는 게 아니라 다들 정말 느긋해 보였다. 내 옆 그리고 그 맞은편에 앉은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 두 분은 오히려 농담을 하며 낄낄거린다. 노트북으로 무언가 열심히 하는 사람, 재미있다는 듯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 피곤해서 잠든 사람, 빵을 먹는 사람도 있고, 두 번째 전화하러 나갔다 다시 기차에 오르며 보니 옆 칸에서는 무려 피자 파티가 벌어졌다.건너편 창가에 앉은 젊은 동아시아인 여성만이 한 번씩 세상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원인이 기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재해라 해도 사장 나오라고 고함치고 난리 났을 텐데...

드디어 기차가 출발하여 다음 역에 거의 이르렀고, 내릴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출입문 근처에 모였다. 지치고 화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어려운 일을 함께 이겨낸 동지들처럼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잠시 수다 파티가 벌어지고 정다운 인사가 이어졌다. 
 
독일에 거주한지 5년이 넘어간다. 하지만 오늘 독일 사람들의 새로운 모습을 봤다. 2시간이나 잡혀 있으면 사람이 화가 나거나 짜증 날 수 있다. 그건 정상이다. 하지만 아무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이게 말은 쉽다. 참고 버티는 인내심이 아니라 두 시간의 기다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그게 그렇게나 품위 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이 에피소드 하나로 타국을 찬양하려고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열심히 일한다고 일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텐션이 높아져 있었다. 말이나 행동도 확실히 거칠어졌다. 내가 스스로 쿨다운해야 한다고 느낀 결정적인 시점은 사소한 것을 사적으로 받아들여 혼자 기분 상해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다. 평소에 내가 싫어하고 다가가지 않게 되는 사람이 바로 사소한 것을 일일이 사적으로 받아들이는 병적으로 예민하고 극도로 자기 방어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 특징을 가진 사람이 특별히 나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유독 그런 사람들한테서는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런데 요즘 나도 모르게 별일 아닌 걸로 과민반응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이 정신이 건강한지 아닌지 판단하는 데 여러 기준이 있고 그중에 하나는 사소한 불쾌한 일에 떼굴떼굴 구르는지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쿨하게 넘기는지 보는 것이다. 
 
화가 날법한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느긋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여주던 독일 사람들을 보며 다시 한번 자기 단련이 필요함을 의식하게 되었다. 화가 날만한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생존 본능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 어느 정도의 감정 조절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감정이란 짧은 순간 지속되고 사라지는 존재라 그에 의존한 판단, 결정, 행동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다면 삶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멍청한 손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그저 '기분을 위해, 기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고 있을까, 얼마나 인생을 꼬이게 할까, 얼마나 나도 모르게 소중한 기회와 사람을 잃었을까...
 
잊을 만하면 오늘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기록해 본다.  
 
 
 
 
 
ⓒ 2023. @hanahanaworld.tistory.com all rights reserved.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