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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행: 창덕궁, 창덕궁 후원, 카페 회화나무 본문

여행기록/2021 여행: 한국

서울 여행: 창덕궁, 창덕궁 후원, 카페 회화나무

Writer Hana 2021. 10. 13.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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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조선왕조의 궁궐이다. 하지만 나는 재미있게도 이번이 창덕궁 첫 방문이다. 어릴 적부터 경복궁과 덕수궁에는 수도 없이 가봤고, 심지어 창경궁에도 가봤는데 왜 창덕궁에는 안 가봤을까? 알 수 없다. 창덕궁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단연 후원인데 이번에 창덕궁에 간 목적도 후원 관람이 1순위였다. 

 

후원에 들어가려면 창덕궁에 유료(2021년 9월, 내국인 기준 만25세~만64세 3,000원 그 외는 무료입장)로 입장한 후 또 별도로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관람 6일 전부터 인터넷에서 예매할 수 있는데 어른 5,000원 그리고 어린이는 2,500원이다. 한 타임에 20명까지 예매 가능하고 현장 판매 티켓은 10장이기 때문에 한 시간에 30명만 들어갈 수 있다. 외국인 전용 쿼터도 있다.

 

30명이라면 많은 수라고 느낄 수 있는데 막상 후원에 들어가보니 생각보다 엄청 넓었다. '사람이 없어서 한적하다'라고 느낄 규모이다. 창덕궁 안내 팸플릿의 설명에 따르면 후원이 창덕궁 전체 면적의 무려 60 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덕분에 사람들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관람할 수 있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현재는 해설 없이 자유 관람이다. 사전 지식이 없다면 그냥 정원을 걷는 느낌일 수도 있겠다. 

 

1392년에 개경에서 개국한 조선은 2년 후 한양으로 천도했고, 경복궁은 1395년에 완공되어 법궁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제1차 왕자의 난 후 정종은 다시 개경으로, 제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은 태종 시절 또다시 한양으로 천도했다. 그러면서 평상시 기거할 목적으로 경복궁의 동쪽에 이궁 건설을 명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창덕궁이다. 하지만 1592년 임진년 전쟁이 시작된 해에 경복궁뿐 아니라 창덕궁도 불타버렸다. 광해군 시절에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1867년에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창덕궁이 조선왕조의 법궁이었다. 그리고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 왕들이 머물렀던 궁으로 사실상 조선 역사의 중심지라 할 만하다.     

 

창덕궁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면 잘 알려져 있듯이 최대한 자연 공간에 맞춰 지어졌다는 점이다. 인위적이고 권위적인 느낌이 강한 경복궁과는 반대다. ≪주례≫를 엄격히 따라 지어졌다고 알려진 경복궁에 들어서면 광화문부터 홍례문, 근정문을 지나 근정전까지 일직선상의 공간 배치가 눈에 띈다. 게다가 편전 구역부터 중궁전과 동궁전도 무언가 자에 맞춘 듯 좌우대칭을 이루며 질서 정연한 모습이다. 법궁에 걸맞은 근엄한 모습인 것이다. 반면에 창덕궁은 돈화문에서 정전인 인정전까지 직선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한 번 꺾어 금천교를 건너가야 한다. 그중에서도 자연에 맞춘 공간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후원이다. 왕실의 위엄을 세울 건축물도 필요하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공간도 필요하다. 강하기만 하면 쉽게 부러질 수 있고, 부드럽기만 하면 만만해 보일 위험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환상의 양궐 체제라는 생각이 든다.  

 

 

창덕궁 인정전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국보 제225호이다. 경복궁의 근정전처럼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 주요 정치 행사가 열리던 공간이다. 나는 저 처마에서 보여지듯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적당히 부드러운 곡선이 참 좋다. 지나치게 날카롭지도 그렇다고 멋없이 밋밋하지도 않다.  

 

 

창덕궁 구선원전으로 통하는 문

후원에 입장할 시간이 되어서 잠깐 구선원전 쪽만 보고 바로 후원으로 갔다. 궁궐 전각은 그 후에 보기로 했다.

 

 

창덕궁 낙선재

후원 입구 옆에 낙선재가 있다.

 

후원에 들어서면 양쪽에 돌담이 있는 언덕길이 나타난다. 서울같이 인구 천만 명이 넘는 메가시티 Mega city의 한 복판이 맞는가 싶게 나무가 울창한데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 가을에 단풍들 때 오면 환상의 색감을 즐길 수 있을 듯하다.  

 

창덕궁의 후원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궁궐 뒤쪽에 있기 때문에 후원 (後苑), 북쪽에 있어서 북원 (北苑), 궐 안에 있어서 내원 (內苑),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어 금원 (禁苑), 비원 (祕苑)이라고도 불렸다. 특히 우리에게 후원 다음으로 익숙한 이름은 비원일 텐데 비자가 숨길 비, 즉 비밀할 때 그 '비'자다. 영어로 번역하면 secret garden이라는 근사하고 신비로운 이름을 갖게 된다. 인스타그램에서 영어로 장소 지정할 때 자동 완성되는 명칭이 "the secret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이다. 

 

나 어릴적에 창덕궁을 창덕궁이라고 배웠는데 그 이전에는 이 창덕궁이 비원이라고 불린 적이 있나 보다. 그 명칭은 일제강점기에 창덕궁을 왕실의 궁궐에서 공원쯤으로 격하시키려는 의도로 붙인 이름이다. 그렇다면 이 후원을 비원이라고 부르는 것도 일제의 잔재일까?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보면 '후원 구역'을 의미하는 바로 '비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한다. 우리도 사용하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덕궁 자체'를 '비원'이라고 하는 것은 일제가 의도한 것이기 때문에 틀렸다고 한다.  

 

 

창덕궁 후원. 자료 출처: http://www.cdg.go.kr/cms_for_cdg/show.jsp?show_no=50&check_no=14&c_relation=26&c_relation2=88

 

문화재청에서 운영하는 창덕궁 공식 사이트에 소개된 후원 관람 코스이다. 1번은 후원 출입구이다. 그 이후 2번 부용지 구역, 3번 애련지, 4번 연경당, 5번 관람지, 6번 옥류천을 돌아 내려오는 코스다. 현재 4번 연경당에서 7번 돈화문 근처의 금호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현재 폐쇄되어 있어 우리는 후원을 한 바퀴 돌고 다시 1번의 후원 출입구를 통해 나왔다. 

 

 

창덕궁 후원 돌담길

9월이라 아직 자연은 초록색 옷을 입고 있다. 

북쪽을 기준으로 이 돌담 왼쪽에는 창경궁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언덕을 한 고개 넘어서자 저 멀리 부용지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와 규장각 주합루

진짜 환상적이라는 말 밖에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인데?? 무엇보다 이 부용지와 만나게 되는 순간이 참 드라마틱하다. 평지에서 어렴풋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언덕 고개를 넘어서면 신선이 사는 곳 같은 부용지가 갑자기 짜잔 하고 나타난다.

 

규장각 주합루: 규장 (奎章)은 임금의 문장을 뜻하고 따라서 규장각은 임금의 어제나 어필을 보관하는 서고를 말한다. 주합 (宙合)은 우주와 합일한다는 뜻이다. 즉 겉보기에 놀기 좋은 공원 같아 보여도 치정과 관련된 장소인 것이다. 아마 이 규장각 주합루를 본래의 취지대로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은 정조 임금일 것이다. 정조 임금은 세도 정치로 인해 왕권이 강력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절에 천신만고 끝에 임금이 되었고 나름 개혁 정치를 추진한 임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규장각을 세워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발전시켰고 연구 성과를 실제 정책에 반영했다고 한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싱크탱크의 역할을 한 것이다. 

 

사진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 주합루 왼쪽에 영화당 건물이 있는데 그곳에서 왕이 입회하는 특별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듯 이 부용지까지는 왕실 일원이 아니라도 출입할 수 있었던 다소 개방된 장소였다. 

 

 

창덕궁 후원 부용정

지금까지 내가 실제로 본 적이 있는 우리나라의 정자 중에 단연 부용정이 가장 아름답다! 

 

건축학적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을까? 작지만 똘똘하고 정교한 모습이다. 게다가 건물의 두 기둥 주춧돌이 연못 속에 담겨 있는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무척이나 "예쁘다". 그렇다면 전문가는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유홍준은 그의 책에서 "부용정은 구조가 대단히 다채롭다. 한옥으로 지을 수 있는 화려함의 최대치가 구사된 것 같다. 평연은 열 십 (十) 자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4면 모두 팔작지붕으로 날개를 펴고 있다. 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곱게 둘렀으며 ... 부용정은 디테일이 아주 정교하여 잘 만든 공예품처럼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한국의 미학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중 '팔작지붕 날개'와 '잘 만든 공예품'이라는 표현에 공감이 되고 내가 느낀 아름다움을 말로 나타내면 이것이 적당한 표현이다.   

 

 

창덕궁 후원 부용정

가까이 다가가보니 창살과 난간의 디테일도 눈에 띈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

부용정은 수련 연못의 화려한 한 송이 꽃 같은 모습이다. 

 

부용정을 연못가에 짓지 않았다면 이렇게 정교한 자태가 돋보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부용정 없는 수련 연못은 특별할 것 없는 흔한 연못이 될 뻔했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

오른쪽에 보이는 건축물은 "사정기비각"이다. 부용지를 처음 지은 것은 세조 임금 때이고, 임진왜란 후 개축한 것은 숙종 임금 때이다. 세조는 부용지를 건설할 때 우물을 파게 했고 그 결과 유리정·마니정·파정·옥정 네 개의 우물이 생겼다. 숙종 임금이 부용지를 개축할 때 이를 기리고 문화유산 보존의 의지를 담아 글을 짓고 비석에 새겨 넣었는데 이것이 사정기비각이다. 

 

부용지의 독특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그곳에 한참을 머물렀다. 사진도 찍고 영화당 돌계단에 앉아 쉬기도 했다. 흐린 날이라 나름 운치가 있었다.

 

창덕궁 후원 애련정

애련정은 숙종 임금 때 지어졌다. 문화재청의 설명에 따르면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고 한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애련정은 지나가면서 보고 바로 연경당으로 올라갔다. 올라갔다고 말하는 이유는 후원 구역에 평지가 거의 없고 언덕이 많기 때문이다. 

 

숙종 임금하면 아무래도 그의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 씨와 후궁 희빈 장 씨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드라마와 책에서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관계를 선악 구도로 그리며 장희빈을 악녀로 묘사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여 장희빈은 중인 출신의 여성으로서 신분 상승 의지를 불태워 금수저 출신의 인현왕후를 능가했던 활기찬 여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숙종 임금은 당파 간에 서로 견제하는 틈을 노려 궁극적으로 왕권 강화를 시도했는데 비정하게도 자신의 부인들마저 정치의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린 냉혈한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런 숙종 임금이 연꽃에 대한 저런 글을 썼다니... 

 

 

창덕궁 후원 연경당

문화재청의 설명에 따르면 순조 28년 (1828년)에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효명 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이 연경당 (演慶堂)을 창건했다. 연경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지어진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는 연결되어있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 민가가 99칸으로 규모가 제한된 데 비해, 연경당은 120여 칸이어서 차이가 난다. 창덕궁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보존하여 그에 맞게 건축되었을 뿐 아니라 이런 민가 건축이 있어서 결코 권위적인 왕실의 거처가 아니게 된다. 

 

  

창덕궁 후원 연경당

 

 

관람지의 관람정

창덕궁 후원에서는 다양한 모습의 정자를 볼 수 있는데 무려 17개나 있나고 한다.

과연 왕실의 정원이라 할 만하다.

 

이후 옥류천 구역으로 가는 길은 등산로라 하기에는 너무 밋밋하고 산책길이라기에는 가파른 언덕길이다. 

 

창덕궁 내 회화나무

후원 관람 후 가보려했던 창덕궁의 여러 전각에는 가지 않았다. 다들 목마르고 지쳤기 때문이다. 일단 나가서 카페인 충전을 하기로 했다. 창덕궁에는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어서 나는 별로 지치지 않았지만 별다른 아쉬움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나올 때는 돈화문이 아닌 금호문으로 나왔다. 

 

 

<카페 회화나무>

카페 회화나무

금호문으로 나와 창덕궁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왼편에 카페 회화나무가 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카페인데 카페 내부에서 보이는 창덕궁 풍경이 아름다워서 오게 되었다. 카페 내부는 생각보다 넓지 않고 테이블 수도 많지 않다. 게다가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처음 도착했을 때는 입구의 2인석 테이블 두 개만 비어있었다. 하지만 자리 운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우리 아니던가! 곧 창가의 4인석 자리가 비어 운 좋게 그곳에 앉았다. 

 

 

카페 회화나무

카페 회화나무의 카페라떼

간식으로 초콜릿이 함께 나온다.

 

이곳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궁궐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참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 시대라면 궁궐보다 높은 건물을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대궐을 내려다보고 들여다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으니 말이다. 

 

 

카페 회화나무에서 보이는 창덕궁 궐내 각사 구역

카페 회화나무에서는 창덕궁의 궐내 각사 구역이 보인다. 

 

다시 한번 문화재청의 설명을 들어보자면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궁궐 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2000~2004년에 걸쳐 복원되었다."라고 한다. 

 

 

카페 회화나무

이번 창덕궁과 창덕궁 후원 기행문에 포함된 역사적 사실은 문화재청 창덕궁 공식 사이트 http://www.cdg.go.kr/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서울편 (1)>을 참고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책의 장점은 그 어떤 자료보다 역사적 사실을 풍부하게 전달해준다는 것이다. 지루하게 사실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상이 곁들여져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반면에 단점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학창 시절에 배워 알고 있는 '문화 상대주의적' 사고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재 OOO은 ~~~한 점에서 훌륭하다."라고만 서술하면 '아, 전문가가 보기에 ~~~한 점이 훌륭한 거구나.'라고 알아들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특히 10권에서 유홍준은 우리의 문화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끊임없이 타국의 문화재와 비교 한다. 예를 들자면 우리의 어떤 점이 자금성에 비해, 일본의 정원에 비해 훌륭하다고 서열을 매긴다. 심지어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고대 아테네와 중세 이후 유럽 주요 도시의 발전상까지 깎아내리며 우리의 한양이 더 훌륭한 발전 과정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서술한다. 적당한 비교와 우열 평가는 비전문가가 문화재의 우수성에 대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지나친 비교는 열등감이다. 꼭 그렇게 다른 문화를 깎아내려야만 우리의 우수성이 입증되는 것인가? 중국, 일본, 또는 유럽의 작가가 그들의 문화재에 대해 글을 쓸 때 "우리 것은 한국의 OOO에 비해 이런 점에서 월등하다"라고 말할까? 그냥 우리 것은 우리 것이고 그들의 것은 그들의 것이다. 조금 더 차분하고 품위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우리의 전통적인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우리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데다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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